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창덕궁 경훈각 (문단 편집) == 여담 == * [[효종(조선)|효종]]의 [[부마]]인 정재륜[* [[숙정공주]]의 남편. [[영의정]] [[정태화]]의 5남으로 작은 아버지인 정치화에게 양자로 들어갔다.]이 저술한 《공사견문록》에 나온 이야기이다. 1659년([[효종(조선)|효종]] 10년) 4월, 당시 [[세자]]였던 [[현종(조선)|현종]]이 [[말라리아|학질(말라리아)]]에 걸렸는데 아무리 [[침]]과 [[약]]을 많이 써 봐도 낫질 않았다. 이에 깜짝 놀라게 하면 학질을 뗄 수 있다는 속설을 따라 [[세자]]를 경훈각 마당에 세우고, 2층 징광루에 올라가 [[기와|질기와]]를 내던져 깨뜨린 뒤, "[[궁녀]] 아무개가 누각에서 낙사했다."고 일제히 외치게 하였다. 그러자 궁중에 난리가 났으며, 이를 본 늙은 [[궁녀]] [[김씨]]가 의미심장한 말을 하였다. >"나는 4대 [[조정]][* [[선조(조선)|선조]] 때부터 궁중 생활을 했을 것이다. [[정묘호란]]이나 [[병자호란]]은 물론 [[임진왜란]]이나 [[정유재란]] 같은 국가의 대사건도 경험하고(직접 겪지 못했어도 주변에 당사자가 많았을 것이다) 궁중에서도 이런 저런 일을 많이 겪은 잔뼈가 굵은 베테랑이었을 것이다.]을 받들었다. 궁중에 일이 있더라도 마땅히 조용히 진정시킬 것인데 이제 일도 없이 일부러 일이 일어난 것처럼 하였으니, 상서롭지 못한 징조다.“ [[그런데 그것이 실제로 일어났습니다|그런데 실제로 얼마 지나지 않아 불행한 일이 일어났다]]. 이로부터 한 달 뒤인 5월에 [[효종(조선)|효종]]이 [[죽음|세상을 떠난 것이다.]] * [[숙종(조선)|숙종]]은 《영경훈각시(詠景薰閣詩)》라는 [[시]]를 지어 경훈각을 [[노래]]했다. 징광루 아래서 [[더위]]를 피하니 [[부채|부채질]]도 필요없고 편안히 좋은 [[그림]]을 감상할 수 있다고 하였다. [각주] ---- [include(틀:문서 가져옴, title=효종(조선), version=313, title2=창덕궁 대조전, version2=75)] [[분류:창덕궁]]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